전시명 : Passing by 박진하展, 2016 갤러리이안 예술가지원 프로젝트 

장르 : 대전전시회 

기간 : 2017년 2월 8일~2월 21일 

장소 : 갤러리이안 

관람시간 : 오전 10:00~오후 6:30(평일), ~오후 5:30(토요일,공휴일), 일요일 휴관 

문의처 : 갤러리이안 042.220.5959 



순간, 흔들림 각 30x30cm,장지 위 채색




floating stone, 60.6x72.7cm장지 위 먹, 금분, 호분




2016 갤러리이안 예술가지원 프로젝트

선정 작가 지원展 


Passing by 

박진하 展



본 전시는 2016 갤러리이안 예술가지원프로젝트에서 선정된 5명의 전시분야 작가 중 첫 번째 전시 박진하의 전시이다. 작가는 ‘순간의 영원성’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작가적 시선이 담긴 철학으로 해석하여 그의 작품에 녹여내려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태초의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라는 기제를 통해 ‘삶’이라는 물리적/추상적 대상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인간)는 지금의 이 순간을 시간이 가진 태생적인 숙명과 순리를 통해 지나쳐 가고 있거나 혹은 애써 지나쳐 버리지만 그 순간은 어느새 우리 각자의 뇌리 속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깊이 각인되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그 ‘영향’이라 함은 결국 나(我)와 타자(他者)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개인의 삶의 과거/현재/미래의 순간, 순간 속에서 맺게 되는 관계는 늘 지나(지나쳐)가지만 그 순간의 영원성은 우리의 몸과 정신 속에 살아남아 문득, 문득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 영원성의 흐름과 상징을 그의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본 전시는 작가적 시선의 시간 흐름과 순간 포착의 의지 표현을 통해서 나(관객)와 타자와의 관계적 순간에 대한 고찰을 해보고자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전시이다. 





지속하는 순간, 116.7x91, 장지 금분 호분 먹




지속하는 순간, 72.7x60.6, 장지 먹 금분




「작품평론」

순간과 지속의 종합*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진하의 ‘지나가는 순간’ 전은 ‘붙잡고 싶은 순간을 남기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있다. 붙잡고 싶은 순간을 최대한 늘리고 더 나아가 영원화 하는 것은 수명이 길든 짧든 지상에서 한시적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소망일 것이다. 그 모든 생명 중에서 인간만이 가지는 예술은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순간을 의미 있는 순간으로 만드는 기술 중의 하나이다. 반대로 그 의미가 무의미에 가까운 것이 되었을 때 새로운 의미로 충전하고 갱신하는 기술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생존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비록 이 의미가 돈이나 권력, 사랑 등 다른 것으로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떤 부류에게 예술은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되거나 희석되지 않는 의미의 결정체가 될 수 있다.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매체는 사진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가는 시공간의 우연적 단편이 남길만한 무엇이 되려면 어떤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는데 있어서 그림은 사진보다는 굼뜨다. 그러나 지각된 순간에 기억이라는 영원의 인장을 찍는 것에는 그림이 더 유리할 것이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화시켰던 모네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모더니즘 시기에 화가들은 경쟁자로 부상했던 사진을 많이 의식하면서도 사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매일 새로워지는 그들의 시대를 기록했다. 그 시대를 기록했던 사진이 산문이라면 회화는 시에 가까웠다. 사진은 산문적이기는 하지만, 일순간 얼어붙은 듯한 수수께끼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맥락이 교차되어야 한다. 그래서 의미에 방점을 찍고자 하는 사진은 거의 그림이 되어간다. 사진을 그림처럼 만드는 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해 있어서, 그것으로 장난도 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또한 현실과 허구, 그리고 장르간의 구별의 불확실해지는 현대에 사진을 만든 것인가 아닌가는 큰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사진과 비교하자면 그림은 수많은 사진이 한데 뭉쳐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림은 함축적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박진하의 작품처럼 추상적이라면 더욱 그렇다. 현대에 만들어진 미술작품 앞에서 의미와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구태의연할 수도 있지만, 재현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미지의 의미와 이해는 여전히 요구된다. 사진도 맥락이 단절되어 있다면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여서, 설명적인 작품 제목이나 텍스트를 덧붙고, 또는 시간의 흐름이 담긴 여러 장의 사진을 나열하면서 일련의 서사를 암시하기도 한다. 박진하가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전시부제를 통하여 사진을 포함한 조형예술에 있어서 시간성이나 서사성을 나타내는 방식은 구성요소의 확정과 그것의 조합이다. 가령 30x30cm 크기의 정방형 캔버스들에 담은 이미지들을 여러 개 조합하여 ‘따로 또 같이’ 작품을 배열하는 작품이 그러하다. 이 경우 각 단위는 작지만 확장성을 가진다. 


구성요소의 확정과 그것의 조합이라는 방식은 세모 네모, 붉은색 검은색 등의 상징으로 혁명의 이야기를 담았던 러시아 구성주의 등에서 활용된 방식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에서는 조형영화의 방식으로 실험되기도 했다. 박진하의 작품에서 예외적으로 사각형이 등장하는 작품은 마치 ‘말레비치의 사각형’처럼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유동적인 배경 위에 띄워 놓는다. 사각형이라는 프레임은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이 전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사진적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장지 위에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는 박진하가 구사하는 조형적 기호는 초창기 추상화의 한 갈래인 기하추상보다는 자연스럽다. 작가의 시선은 물, 하늘, 돌 같은 대상에 많이 머물러 있다. 그것들은 여백과도 구별될 수 없는 무위적 요소들이다. 만약 작품에 둥근 것이 나온다면 완전히 둥글기 보다는 돌멩이를 닮은 것이 나오는 식이다. 작품 속 형상은 자연과 인공 사이의 어디쯤 위치한다. 


그 자연스러운 외곽선은 구름이나 칠흙같은 밤이 연상되는 표면을 감싸고 있다. 금분으로 그어진 점에 가까운 짧은 선들은 글자나 귀한 물건 등, 궁극적으로는 자연에서 왔지만 보다 인공적으로 정제된 기호의 배열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품마다 다양한 결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선을 벗어나 흩어져 있기도 한다. 중력의 방향과 관련하여 금빛 점선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조형요소들로 상징적인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공간 역시 진공이기 보다는 여백을 생각하게 하는 옅은 바탕이다. 박진하의 작품은 이 여백 위에 여러 굴곡과 촉감을 가지는 폐곡선의 구성이 주를 이룬다. 이 구성은 대체로 여러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아우를 수 있는 풍경 같은 분위기지만, 하나 또는 둘이 화면 가득히 잡혀있을 때는 인물이나 정물 같은 분위기도 있다. 폐곡선들은 서로 다른 배치를 통해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폐곡선은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교차 면에서 또 다른 영역을 만들기도 하며, 그림틀에 의해 잘려지기도 한다. 


금분으로 칠해 진 내용물들은 작품마다 밀도와 방향을 다변화한다. 값비싼 재료이기도 한 금분은 귀한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다른 요소에 비해 한 땀 한 땀 채워가는 노력이 투입된다. 요즘 시국에서는 광장에 가득한 수많은 촛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상이 가능한 것은, 금분으로 된 이미지들이 소원을 담아 날리는 풍등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멀리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등들처럼, 최고 권력을 향한 민초들의 촛불 메시지는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가진다. 그것들은 마치 원자처럼 이합집산하면서 또 다른 역사를 이야기할 것이다. 전시된 작품에는 어떤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하나를 기준으로 삼으면 시간의 흐름이 감지된다. 아래 있던 원이 위로 갈 수도 있고 그 반대 일수도 있다. 한 작품에서 전경을 이루던 것이 다른 작품에서는 후경을 이루기도 한다. 떨어져 있던 것이 만나고, 어느 요소만이 공간을 한가득 차지할 수도 있다. 


그 모두가 각기 다른 순간이며, 순간과 순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서사가 발생한다. 작가라는 발신자가 생각했던 서사가 관객이라는 수신자가 생각하는 서사와 일치하리라는 법은 없다. 추상적인 표현은 자자구구적인 의미의 일치가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지향한다.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개념은 지속과 순간, 과정과 고정, 서사와 이미지 사이의 차이를 의식하게 한다. 궁극적으로는 시간과 공간, 열림(무한)과 닫힘(유한)의 문제이다, 작가는 이 차이를 의식하면서도 그 둘을 종합하려 한다. 그것이 어떤 시간이라면 정점의 순간, 그것이 어떤 행동이라면 함축적인 자세, 그것이 어떤 이야기라면 결정적인 대목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동시에 관객은 여러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보게 되므로 작품 하나에 중첩되어 있는 이야기뿐 아니라,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극을 상상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순간이며, 순간과 순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또한 이 간극은 한 작품에서 여백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박진하의 작품은 움직이지 않지만 지속을 내포한다. ‘지나가는’이라는 키워드는 이러한 지속을 말한다. 바슐라르는 순간이 지속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를 바랬던 철학자였다. 새로움을 순간적인 것과 동일시한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시간의 참된 현실은 순간이고, 지속은 어떠한 절대적 현실성을 갖지 않는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지속이란 순간의 먼지들’에 불과하다. 그는 ‘지속이 지니고 있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방탕한 이질성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반대로 ‘우리 자신 안에 길들여 있는 단순한 것, 강한 것, 항구적인 것, 그 모든 것들은 순간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베르그송에게 ‘시간의 참된 현실은 지속이고, 순간은 어떤 현실성을 갖지 않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바슐라르) 순간과 지속은 철학사에서 팽팽한 평행선을 달렸고, 철학의 한 분파인 미학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술사로 치자면 고전적/ 낭만적의 대조가 대표적일 것이다.


​비평적 담론에서 대표적인 것은 프리드가 [미술과 사물성]에서 논한 ‘모더니즘적 추상의 현재성(presentness), 순간성, 추상성’ 대 ‘미니멀니즘의 현존성(presence), 지속성, 사물성’의 대조 개념이다. 프리드의 논의는 예술의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시켜 결국은 해체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술이 끝난 것은 아니다. 박진하의 작품은 어떤 심상을 순간적으로 고정시킨 것이지만, 그 안팎에는 지속이 있다. 특히 금분으로 칠한 점선은 폐곡선 안팎에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담지하고 있으며, 이것을 찍는 행위 속에서 경험하는 무념무상의 경지는 현존을 말한다. 현존성은 꿈이나 퍼포먼스처럼 지속의 경험에 내재한다. 구름을 연상시키는 얼룩덜룩한 문양 또한 불확실하지만 유동적이고 지속적인 어떤 것을 암시한다. 대체로 붕 떠있는 듯한 부유하는 형상들이 그러하다. 작가는 한 작품에서 원자의 배열과도 같은 조형요소에 균열을 가하면서 변화의 원동력으로 바람개비—이전 작품에서는 바람개비는 전면에 나와 있다--형상을 심어 놓기도 했다. 


이 전시의 또 하나의 키워드인 ‘순간’은 이러한 애매한 지속의 흐름을 한정시키는 외곽선에 있다. 그것은 여백을 가로지르는 선으로 이루어지는 동양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양화’ 전공자들과 접하면서 그들이 끝없이 인간을 이야기함에 비해, 자신은 자연에 바탕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연적 요소로부터 추출해온 조형요소들이 여백 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박진하의 작품들은 그녀가 연구했던 노자와 장자, 그리고 베르그송 만큼이나 고대 원자론자들의 자연학을 떠올리는 부분이 있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물질적 미립자들을 모든 현실의 씨앗으로 보았다. 현실은 원자들의 형태, 배열, 위치에 달려 있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은 중세의 기나긴 형이상학의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 과학의 세계관과 만난다. 원자들은 무한한 허공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 허공이 바로 여백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생각이 예술적 사고와 만나는 부분은 그들이 물질 뿐 아니라 영혼 역시도 아주 작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것에 있다.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루크레티우스는 정신과 영혼의 구성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그것들은 숨(바람), 열기, 공기, 그리고 ‘이름 없는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론자들에게 탄생은 결합이요 죽음은 해체였다. 원자론자들에게 원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운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허공의 존재였다. 허공은 박진하의 작품에서 여백처럼 형태와 형태, 순간과 순간 사이의 간극이자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며,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는 공간이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고대 원자론자들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연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반면 운동을 그저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폄하한 이들은 ‘전체는 하나이며 영원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파르메니데스)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데아처럼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순간만을 중시한다. 반면 불연속이 연속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원자론자들의 사유는 반(反)형이상학적이다. 고대의 원자론이 현대의 사상과 예술에 던져 줄 수 있는 빛은 그것이 ‘인간중심주의적인 과도한 목적론을 공격하기’(장 살렘)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는 변조된 신학에 불과했다. 고대 원자론과 마찬가지로 동양적 사상 또한 인간을 결코 세상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 사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이 왜곡되었다. 중심/주변의 논리에 의거한 식민의 체험이 선명한 근대를 관통하면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은 물론 같은 인간들끼리도 평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것은 도구적 합리성만을 발전시키고, 자연은 물론 점차 더 많아지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화한다. 박진하의 작품에는 대상이 없다. 만약 거기에 대상 비슷한 것이 있다면 바람, 돌, 구름, 빛 같은 자연적 요소이다. 그리고 그 요소들의 시간성인 자연적 과정이다. 그러나 완전한 무위적 태도를 견지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아예 붓을 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붓을 놓은 사람들은 관념의 유희에 빠져 대중과 더욱 멀어지곤 했다.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박진하의 전시부제는 균형점을 중시한다. 그녀의 작품에 내포된 불연속과 연속의 관계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이성, 발생을 가능케 하는 구조, 우연을 의미 있게 하는 필연, 죽음이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몫 등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지속하는 순간, 72.7x60.6, 장지 먹 금분




[작가프로필]


박진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現 국민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박사과정


개인전

1회 개인전  인사갤러리 B1F

2회 개인전  ‘바람꽃-부유하다’ -하이닉스갤러리

3회 개인전  ‘floating plants'- 대전 모리스갤러리 

4회 개인전 지나가는 순간 - 가나아트스페이스


단체전

2016 미탐 전, 상암DMC 아트갤러리

      한국화회 ,조선일보미술관

2015 한국화회, 조선일보미술관

 쾌연재, 아시아호텔아트페어 AHAF2015 ,콘래드서울

2014 <JOYFUL>전 - 대전 갤러리이안

 강남미술협회정기전 -역삼문화센터 전시장

2012 <JOYFUL>전 - 대전 갤러리이안

외 다수


논문

바람개비를 소재로 한 정신적자유 표현연구 ,2009 석사학위논문

베르그송 ‘순수지속’을 반영하는 회화의 ‘물아일체(物我一體)’사상 표현연구, 

2016 조형미디어학회 vol.19 no.2


활동

한국미술협회, 강남미술협회 회원 / 한국일러스아트 (SOKI) 학회 회원


작품소장처

청주지방검찰청,대전지방검찰청, 베터라이프요양원






문화가 모이는 곳 "대전공연전시" http://www.gongj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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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전공연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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