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갤러리메르헨 기획 초대 유근영전
전시회 2021. 9. 26. 15:43 |
전시명 : [세종] 갤러리메르헨 기획 초대 유근영전
유형 : 세종전시
날짜 : 2021년 9월 24일~10월 30일
관람시간 : 8:30~23:00
장소 : 세종시 홍미당 세종AK점
문의처 : 갤러리메르헨 010-7444-7187
유근영, 해방의 춤
Ⅰ. 유근영은 대전에 거주하는 작가다.
그의 전시회에 대한 한 리뷰에서 나는 이미 이 사실을 밝힌 바 있지만, 그가 대전을 떠나지 않고, 오직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키포인트가 된다.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회화를 고집해 온 것, 세속적인 처세에 서툰 반면 예술에 대한 집념이 남달리 강한 성격, 하나의 테마에 대한 일관된 천착 등등은 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서들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세상이 그의 주변에서 변화하는 동안에도 정작 그 자신은 그러한 변화에 눈길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길만을 고집해 왔다는 뜻이 된다.
유근영은 오랜 세월 동안 향리인 대전에 칩거하면서 지금까지 이십여 차례의 개인전을 주로 그곳을 중심으로 가진 바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서울에 비교적 생소한 작가이면서 동시에 발굴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세속적인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화력(畵歷)에서 가자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4년 전에 열린 한림미술관 초대전(2000.12.22-2001.3.31)이었다.
당시 대전 소재 시립미술관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를 지녔던 한림미술관에서 그는 작품세계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는 최초의 미술관급 전시였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었다.
비록 근작 위주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한계였지만, 이 전시를 통하여 그의 작품이 지닌 진면목이 어느 정도 화단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Ⅱ. 유근영은 꽃을 즐겨 그린다.
따라서 꽃은 그의 그림에 있어서 주된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그려진 꽃들은 눈앞에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꽃이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각인된 꽃의 ‘이미지’라는 편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것들은 그의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다양한 형태의 꽃의 이미지들을 화면에 옮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상으로서의 꽃은 그의 화면에 부재한다.
그는 꽃을 그렸으되, 통상적인 의미의 정물화 범주에 그것을 넣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꽃 그림을 정물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식적인 성격이 강한 패턴화(畵) 혹은 색채와 평면성이 강조된 관념적 추상화에 더 가깝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볼 때 꽃을 그린 정물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꽃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에 기인한다.
그의 작품들이 꽃잎과 줄기, 잎사귀 등등 꽃을 구성하는 구성인자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의 작품들을 꽃에 관한 그림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유근영은 왜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꽃이라는 대상에 대한 통상적인 의미의 접근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시각을 갖게 한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물어져야 할 사항들이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이야말로 여타의 작품과는 뚜렷이 다른 미적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만큼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 유근영이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은 1986년에 가진 첫 개인전에서 비롯된다.
당시 인사동 선화랑 근처에 있던 윤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으로 화단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가 1948년생이니까 30대 후반에 해당하는 이 무렵에는 아직 뚜렷한 작업의 방향을 정하지 못한 그가 이런 저런 모색으로 소일하던 때였다.
그의 오랜 지기인 임동식의 술회에 의하면, 대전 태생인 그는 60년대에 미술에 대한 꿈과 열정을 품어 온 이후, 서울에서 보낸 몇 년간의 유학생활을 빼고는 “오늘날까지 까딱 않고 대전화단에서 자신의 길을 모색”(임동식)해 온 작가다.
그러니까 1986년 윤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은 서울화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십여 차례의 그룹전 참가 경력을 그의 경력 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들은 본격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가들이 흔히 갖는 통과의레에 지니지 않는다.
개인전이 일관된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파편화된 그룹전과는 비중이 다르다고 한다면, 화가가 되기 위한 입문적 절차로서의 개인전은 작가 개인에게 있어서나 경우에 따라서는 미술사에 있어서 조차 의미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근영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첫 개인전에서 그가 보여준 작품의 내용이야말로 현재 그의 작품세계의 싹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정형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무제, Untitled> (Untitle(1986) 시리즈는 60년대 후반에 한국 화단에서 성형했던 옵티컬 아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는 그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대학을 했던 기간으로 앵포르멜의 영향권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 현대미술의 팝(Pop)이나 옵(Op: Optical Art의 준말)과 같은 새로운 서구사조에 경도되던 시점이었다.
유근영은 재학 중에 한창 유행했던 이 사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러한 경향의 작품을 제작한 바 있다.
그의 <무제> 시리즈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빗살무늬 패턴은 이 시기의 흔적으로 읽혀지거니와, 이러한 패턴의 등장은 그의 개인사적 입장에서 볼 때, 약 10여 년에 걸친 공백의 결과로 읽혀진다.
그는 70년대에 한동안 개념미술적인 경향의 오브제 작품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지적 편력에 가까웠다.
80년대 초반에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 이론적 섭렵을 모색하게 된 까닭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지적 편력의 연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85년대에 제들마이어에 대한 논문을 쓰고 미학과를 졸업한 그가 비평이나 미술사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고 다시 창작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을 보면, 그에게는 학자나 비평가보다는 작가적 기질이 더욱 농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윤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 유근영은 연속적으로 발표의 기회를 늘려가게 된다.
같은 해에 대전의 신신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후 지금까지 거의 매년 개인전을 열고 있는데, 이는 그룹전 보다는 개인전을 통한 발표에 보다 큰 비중을 두는 그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무렵의 작품들은 예의 음영에 대비가 뚜렷한 시각적 패턴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방식을 띠고 있었다.
얼핏 풀잎을 연상시키는 이 패턴들은 다시 작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빗살에 의해 무수히 분할되는데, 화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화려한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풀잎들이 유사한 모양을 지니고 있으나 크기가 서로 다른 것처럼, 유근영의 작품에서 보이는 패턴들은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와 음영의 변주를 낳게 된다.
바로 이 점이 그의 화면을 역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인인데, 이는 60년대 옵티컬 아트의 영향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비록 옵아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유사한 패턴의 반복이란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지 본질적인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무제> 시리즈에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깊이 끌어당기는 공간의 층위들이 존재한다.
풀잎을 연상시키는 패턴들이 서로 교차되거나 겹쳐지면서 이루어지는 공간의 겹들(layers)은 마치 단자(monad)를 연상시킨다.
독립적인 단자들이 겹치거나 교차되면서 이루어내는 조화는 수많은 인간군상이 어울리며 살아가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는 조화가 있고, 그런가 하면 부조화도 있다.
숲도 마찬가지다. 풀잎과 꽃, 각종 덩굴이 어우러진 숲은 수많은 단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이다. 거기에도 조화가 있고, 그런가 하면 부조화도 존대한다.
그러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이기 때문에 부조화보다는 조화에 더 가깝다. 오직 인공이 가해졌을 때문이 부조화인데, 그런 경우를 가리켜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출중한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유근영 역시 작업에 있어서 일관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작업 스타일을 두고 하는 말인데, 작품의 지속적인 전개에 있어서 태도의 수미일관성이 결여돼 있거나 논리적인 비약이 심하면 대개는 작가의식이 결여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때로 이 일관성은 작가(professional artist)의 수준을 재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유근영에게 있어서 스타일의 지속적인 전개는 평면 공간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에 힘입고 있다. 그것은 86년 무렵 <무제> 시리즈에서의 층위의 교차에서 출발하여 87년의 <우주적 공간(Cosmic Space)>에서의 층위에 대한 평면 조건의 확인
(노란색 혹은 청색의 띠의 등장이 그것으로 여기에서는 층위의 존재(허상)를 평면적인 띠로 확인시킴으로써 일루전의 문제를 확인하는 70년대의 개념적 사고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을 거쳐,
90년대 초반의 <엉뚱한……> 시리즈가 제시하는, 2차원 평면을 그저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 간주하는 편안한 사고에 이르고 있다.
<엉뚱한> 시리즈는 엉뚱한 나무, 엉뚱한 하늘과 나무, 엉뚱한 산, 엉뚱한 바다, 엉뚱한 자연, 엉뚱한 모모, 엉뚱하게 시든 꽃……등등 <엉뚱한 자연> 시리즈의 등장은 그의 작업을 논리나 개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적어도 현대회화의 논리적 전개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정말 엉뚱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그의 작품을 보다 섬세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회화는 그것이 구상이 됐든 추상이 됐든 간에 점, 선, 면, 색, 빛, 공간과 같은 회화의 근본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서 그림은 내용인가 아니면 형식인가 하는 해묵은 명제를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모리스 드니(Morris Denis)가 회화는 여사여사한 일화나 누드 이전에 근본적으로 ‘색채로 뒤덮인 평면’ 임을 강조한 이래, 회화는 비로소 내용에서 형식으로 전이된다.
그 이후의 숱한 논쟁들은 하나의 거대한 논쟁사의 줄기를 이루며, 그것은 곧 현대 추상화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고흐의 정념, 고갱의 색채에 대한 맹신, 세잔의 화면 구성에 대한 탐구 등등 근대회화의 지류들은 마티스에 와서 대하(大河)를 이루며 종합되기에 이른다.
이미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평평한 회화의 평면성을 준수한다는 것은 일루전의 이율배반을 어떤 시각적인 트릭이 없이 해소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현대 추상회화의 역사는 회화를 점, 선, 면, 색 등등 회화의 근본 요소로 환원시킨,
이미지로부터의 해방의 역사임과 동시에 자율적 존재로서 그 자체 하나의 주제가 되는 자율의 역사였던 셈이다.
Ⅳ.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유근영의 그림을 어떤 각도에서 봐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를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한국 작가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이, 서양의 비평적 기준(critical criteria)이나 서양의 문화에 길들여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문화란 것이 그 속성상 미적 취미(aesthetic taste)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이 취미에의 길들여짐은 때로 미묘한 파장을 낳게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파장은 가령 그의 그림을 서양의 특정한 미술사조와의 연관선상에서 파악할 때 증폭될 위험이 있다.
그럴 때 비평가는 곤혹스럽다. 그리고 고독해 진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을 가리켜 ‘마티스와 닮았다’ 라고 말할 때, 이러한 진술은 때로 한 인간의 처절한 삶의 외침을 단번에 무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러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때로는 우회로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유근영의 그림을 과도한 색채의 사용과 구성적 이미지의 도입을 이유로 시대의 뒤떨어진 진부한 작품으로 폄하하는 태도 역시 온당치 못하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역사주의적 관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근영의 작품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그의 작품에 즉해서 작품 속에 내재된 변화의 추이를 살피는 데에서 비롯되며,
그런 가운데 그만의 독창적인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Ⅴ. 모두에 언급한 것처럼 유근영의 그림은 풀잎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패턴으로부터 출발했다.
대략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의 그림은 자연을 소재로 한 화려한 색채의 시각적 잔치로 바뀌었다.
그 긴 도정을 이 자리에서 거론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초기에 추상적 패턴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세계가 90년대 초엽의 <엉뚱한 자연> 시리즈에 이르면 하나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며,
그로부터 현재의 이르기까지 풍경화와 정물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상이 세계를 펼쳐가고 있다는 점이다
.
<엉뚱한 자연> 시리즈에 등장하는 물상들은, 그것이 자연의 풍경이건 도시를 비롯한 인공적 풍경이건 간에, 기억의 산물이다.
그는 대상을 마주한 채 그림을 그리고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매일 풍경화를 좁은 나의 화실에서 벽을 쳐다보며 그린다 어릴 때 보았던 길가의 민들레, 어저께 보도블록 사이를 기막히게 뚫고 나와 피어있던 강아지풀,
오늘 T.V에서 보았던 갈대의 숲, 비틀즈의 노래에 나오는 노르웨이의 숲을 그린다. 시간을 그린다. <옥토퍼스의 정원>, <페니래인>도 그린다. 시간의 편린에 묻어있는 모든 것을 그려나간다.”
그가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한다면, 그의 그림은 상상의 산물이요, 기억의 직조물이다.
그는 어린이가 상상화를 그리듯, 기억에 의존하여 상상의 풍경을 그려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물상들은 그 구조에 있어서 논리성을 결하고 있다. 원근법에 의한 근대원소(近大遠小)의 법칙이 없는 대신에 주대종소(主大從小)와 같은 원시적인 표현법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어느 것이 보다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오직 그의 마음에 달려있다. 한 마디로 붓 가는 대로 생각이 미치는 대로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미지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그의 <엉뚱한 자연> 시리즈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그의 그림에서 색체는 가장 강렬한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머금은 색채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이끌려지며, 보는 사람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상상에 의해 풍경과 정물을 그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유근영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색체의 작열과 수많은 붓질의 흔적의 몰입의 결과물이다.
그의 그림들은 이성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곧 해방을 의미한다.
이성의 통제 하에 억압돼 있던 순수한 감성을 해방시킴으로써 정신적 치유를 도모하는 것, 그것이 색채가 지닌 기능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해방의 춤을 추는 이 시대의 샤만 임을 분명에 보인다.
그리고 인터넷과 컴퓨터로 대변되는 디지털의 시대에 그가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이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야말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원초적인 작품 내용과 함께 현대문명이라는, 멈출 줄 모르는 열차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견제구 일지도 모른다.
윤진섭
유근영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졸업
개인전
1978-2021개인전46회
대전.서울.헤이리.서산.청주.청도.세종
단체전
2019 GFAA/대전’그리다, 꿈꾸다전
(대전골프존조이마루6층아트센터쿠/대전)
2019 ‘15c철화now전’(아트센터쿠/대전)
2019 3.1독립만세운동100주년 기념100인전
(대전중구문화원)
2019’해를품다’전(보령문화예술회관)
2020 14th이코노텍스트전(이공갤러리)
문화가 모이는 곳 "대전공연전시" http://www.gongj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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