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무용단 제65회 정기공연 '덕혜(德惠)' 앙코르
국악, 무용 2018. 10. 7. 15:16 |공연명 : 대전시립무용단 제65회 정기공연 '덕혜(德惠)' 앙코르
장르 : 대전무용 공연
날짜 : 2018년 11월 1일~11월 2일
시간 : 19:30
장소 : 대전시립연정국악원 큰마당
티켓정보 : R석 20,000원 S석 10,000원 A석 5,000원
관람등급 : 8세 이상 입장 가능
소요시간 : 80분
주최/기획 : 대전시립무용단
문의처 : 대전시립무용단, 042)270-8352~5
예매처 : 대전시립무용단,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인터파크, 아르스노바
작품해설
□ 작품의도
늘 역사에는 암울해서 슬프고, 혹독해서 불편한 진실들이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가 그렇다. 강제로 주권을 강탈하고 통치권을 양여한 일제강점기는 그래서 너무도 슬프고 아픈 역사이다. 그 범람하듯 밀려왔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망국의 옹주(翁主)로 태어나 눈물과 회한으로 생을 마감했던 ‘덕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슬픈 역사인 것이다.
고종의 딸이었고… 조선의 마지막 황녀였던 그녀는 볼모로 일본에서 반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나마 15년은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야 했고, 일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정략결혼에서 이혼… 그리고 딸의 사망 등 참으로 힘겨운 질곡의 삶을 살았지만, 정작 해방 이후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막으며 그녀에게는 질긴 운명과 힘든 시련만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랜 귀국거부 끝에 1962년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만 정작 그녀를 반겨주는 이는 없는 안타까운 현실과 직면해야만 했다. 귀국 20년이 지나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한 끝에 1989년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생을 마감했으나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렇게 사라져갔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토록 아프디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무대에 올려진 ‘덕혜옹주’의 삶을 통해 과거의 국치(國恥)를 다시 들여다보고 다시금 상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역사는 결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 믿는 까닭에서…
□ 안무 의도
무거운 역사 속에 박제되어 있던
마지막 황녀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결정적인 요인은 소설 <덕혜옹주>이다.
그 이후… 영화와 다양한 무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며
다시 기억되고 재조명되었던 아픈 시대를 살아갔던 여인.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서러운 생을 살았지만
이처럼 서러운 적은 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외로울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여인이 이토록 서러울 수 있을까.
내 곁에는 바람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
- 소설 <덕혜옹주> 중에서
작품 <덕혜>는 무용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덕혜옹주’의 일생을 극화 시키지 않고 이미지로 구성하고자 한다.
아픈 시대를 살다간 너무도 비극적인 여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모질고 척박했던 시간들…,
한(恨)이 켜켜이 쌓여 병이 되었던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녀… .
그러한 이유들로
어루만지는 침잠(沈潛)의 시간을 이제 무대에 올린다.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
1912년 5월 25일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으며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 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 받았고,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흘러가는 대로>에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 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 작품 내용 및 구성
< 작품의 특성상.., 나열식의 위인 일대기나 줄거리화가 되지 않도록 각 scene은 ‘덕혜옹주’의 상황과 환경을 상징으로 각 시점을 풀어나가도록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조명과 무대미술, 영상이 scene과 scene의 얼개를 짤 수 있는 구성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prologue . 족 쇄. 足鎖
내 발을 옥죄고
다시 내 온몸을 옥죄는
이 속병은 업일까, 업보의 족쇄인걸까,
차디찬 쇠창살이 앞을 막아 선 이 그늘진 공간은
어쩌면 나라를 잃었던 그날부터
나에게
또 우리에게
아프게 채워진 족쇄였나 보다.
옴짝도 못한 채 끌려가야 했던 서글픈 인생길처럼… .
- prologue는 이 작품 전반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나라를 잃었고, 나이 여덟에 고종의 승하를 겪었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유배 같은 일본행을 불과 열네 살에 겪어야 했던 ‘덕혜’의 모진 운명이 아마도 조현병(調絃病, Schizophrenia)을 앓게 했을 테니 말이다.
- 이 scene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자의식을 잃어가는 ‘덕혜’의 솔로로 시작되어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 연결되는 구성이다.
- 조명과 조명이 겹쳐 만들어내는 쇠창살의 느낌을 극대화 시켜 모질고 고통스러운 덕혜의 솔로를 담아낸다.
제 1 장 . 너무도 아련한 …
조선의 마지막 황녀는
예뻤고 사랑스러웠으며
나라를 빼앗긴 고종에게는 낙이자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덕혜의 나이 여덟…,
마치 앞으로 닥칠 질곡의 삶을 예고하는 마냥
의문스럽고 갑작스럽게 고종이 승하하게 된다.
돌아보면
그 짧은 시간만이 유일한 위로이자 안식…,
그렇게 그녀에게는
너무도 아련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 prologue의 솔로에서 회상scene으로 연결되는 1장은 ‘덕혜’의 행복했던 궁 안에서의 유년시절로 시작한다.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이며 나이 육십에 얻은 유일한 딸이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깊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고종은 어린 딸을 몹시도 사랑하여 덕수궁에 유치부까지 설치를 할 정도였다.
- 그 짧은 나날을 ‘덕수궁의 꽃’이라 일컫기도 한다.
- 하지만 꽃의 찬란함도 잠시였으니 모든 날개를 꺾인 채 일제에 휘둘리던 고종은 결국 의문의 독살을 당하게 되고, 남매인 순종과 영친왕. 고종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덕혜옹주 이 모든 왕족은 너무도 처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 1장의 구성은 2개의 이미지와 서정이다.
- 행복했던 덕혜의 유년시절과 아버지인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 이 따뜻함과 암울함의 상반된 두 이미지를 무대 위에서 전환되는 의상과 조명, 영상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구성한다.
제 2 장 . 얼어붙은 봄...
그 해…,
이르게 찾아올 것처럼 잠시 따스하던 봄 햇살은
다시금 겨울 끝자락에 얼어붙었다.
마치 열 넷…,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학이라는 허울에 칭칭 동여매어진 채
볼모로 인질로 내 나라 내 민족과 헤어져
머나먼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덕혜처럼… .
얼어붙은 봄 마냥
그렇게 덕혜의 삶도 모진 한파에 휘말리고 있었다.
- 2장은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덕혜의 시점이다.
- 무대 하부를 활용하여 구성되는 이 scene은 웨건에 실려 상수로 퇴장하는 주인공의 감정 묘사에 집중한다.
-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소학교에 다녔다.
- 당시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 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 받는다.
-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가게 된다.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 그리고 도쿄까지… . 그 이후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 무대 하수에서 상수로 출발하는 웨건은 일본으로 떠나는 ‘선박’을 의미하고, 볼모로 낯선 타국으로 끌려가는 ‘덕혜’를 안타까워하는 백성의 군무를 접목시켜 이 scene을 비장하고 처연하게 구성한다.
- 어린 나이에 낯선 곳으로 떠나는 ‘덕혜’의 불안하고 떨리는 심정을 담아낸다.
제 3 장 . 혹독한 시련…
늘 고난은
추스를 겨를 없는
빼곡한 협곡처럼 들어차 있고,
늘 시련은
끝도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처럼
어둡고 깊숙하게 발밑에 놓여있다.
정략적인 일본 백작과의 결혼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생활의 파탄도
어렵게 낳았던 하나뿐인 딸의 죽음도
그렇게 덕혜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터…,
늘 그녀를 괴롭히던 조현병으로 남아
협곡처럼 망망대해처럼 삶을 갉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작품에서의 3장은 덕혜옹주의 피폐해져 가는 삶을 온전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 2장에서 연결되는 무대 하부의 이동은 ‘일본’이라는 낯설고 생소한 곳을 무대 set로 이미지 전달하고, 이어지는 결혼과 딸의 출산, 그리고 딸의 죽음까지를 주인공의 감정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한다.
- 또한 3장은 일본이라는 낯선 곳, 정략 결혼, 출산, 죽음을 잇는 정신병원 장면으로 끝내게 되는 scene으로 이는 prologue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미지이다.
- 덕혜옹주는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왔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울증과 치매증을 앓기 시작했다. 1930년 대마도주인 백작과 결혼 할 당시에는 병세가 조금 호전 되었으나, 1933년 딸을 낳은 후 산후 우울증과 겹쳐 치매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 당시 정신병은 감춰야 하는 수치스런 질병이었고, 백작은 아내를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은 채 집안에 가뒀다 전해진다. 어렵게 낳은 어린 딸과 덕혜는 격리되었고, 백작과의 이혼 후 딸 ‘종정혜’는 20세 안팎의 젊은 나이에 일본인과 결혼하였는데 상대는 대학 동기였다.
제 4 장 . 나를 모른다 하오…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해방의 벅찬 기쁨과 목매인 함성은
현해탄 너머 먼 곳까지 울림이 되어 메아리치는데도
여전히 덕혜는
조국으로 모국으로 돌아갈 길 요원하다.
이미 나라는 그녀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소설 속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 4장은 해방과 먼 타지에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덕혜의 상반된 이미지로 구성된다.
- 3장에서 main stage로 이동되었던 턴테이블이 다시 rear stage로 원복된 후 연결되는 4장은 해방의 이미지는 rear에서부터 구성되고, 덕혜는 여전히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솔로를 main에서 연출하여 한 무대에서 두 개의 구성으로 교차 편집되는 scene이다.
- 해방직후 이승만 정부에 덕혜옹주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왕실 재산을 국유화하고 왕족들을 천대하는 잘못된 정책으로 그녀의 귀국을 가로막았다.
- 그런 편협한 정권으로 인해 이씨 왕가의 자손들은 해방이 되고도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고, 덕혜는 여전히 쓸쓸한 정신병원 병실에서 귀국할 날만 고대하며 척박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제 5 장 . 오랜 염원…
그로부터
강산이 바뀌고 또 바뀔 즈음
비로소 덕혜는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게 된다.
덕수궁의 꽃이라 사랑받던 어린 소녀에서
세월의 풍파를 거치느라 이미 지쳐버린 중년 여인이 되어…,
그러함에도
조국은 그녀의 마지막 안식이었고 마지막 자리였으며
그리고 오랜 염원이 이뤄지는 감격의 시간이었다.
- 5장은 일본으로 떠난 지 37년만에…, 나라가 해방된 지 17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덕혜옹주’의 심정과 감동을 그리는 scene이다.
- 덕혜는 1962년 1월 26일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37년 만의 귀국이었다. 14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그것도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온 것이다.
- 당시 일간지에서는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 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결혼을 하게 되자 모든 것이 구슬프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그녀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epilogue . 덕 혜. 德惠
누가
그 이름을 이토록 안타까이 되뇌였을까.
그리고 누가
그녀의 일생에 이토록 눈물 흘리며 죄스러워 했을까.
낙선재(樂善齋)…,
옛 궁궐의 시간 안에서 부디 편안하기를
또 누가 기원하고 있을까… .
- 조선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생을 마친 창덕궁의 낙선재.
- 덕혜는 귀국 후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가 1967년 무렵부터 말년을 보낸 거처는 낙선재(樂善齋)였다.
- 조선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고단하고 힘들었던 삶을 마치게 된다.
- epilogue는 덕혜의 죽음을 경건하게 장암하게 묘사한 장면이다.
- 1989년 4월 21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덕혜옹주’를 기리며 하얀 무덤과 하얀 소복의 군무가 펼치는 마지막 그녀를 향한 후세의 진심이다.
문화가 모이는 곳 "대전공연전시" http://www.gongj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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