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기산 정명희 개인展 

장르 : 대전전시 

날짜 : 2018년 2월 22일(목)~2월 28일(수) 

장소 : 이공갤러리 

관람시간 : 11:00~19:00 

관람료 : 무료 

문의처 : 042-242-2020 



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17-23




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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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018년 근작
눈으로 보는 소리와 물결의 다층적 변주 

허나영
(선화기독교 미술관 큐레이터,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매번 기산의 작품은 놀랍다. 새로움에 놀라고 연속성에 놀란다. 한 작가의 예술인생이라는 유구한 강을 따라가다 예상 못한 풍경을 마주한 느낌이다. 여전히 그 강의 특색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기산의 작품은 합지에 먹을 사용하는 수묵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채색과 콜라주를 하여 현대적인 화면을 갖는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현대 추상회화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중첩되는 재료의 사용과 작가가 가진 문인적 정신이 결합되어 하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인 층위를 갖고 있다.
기산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저 “그림이 나를 그리고, 스스로 저 살 궁리를 하는 것”이라 너털웃음으로 평한다. 전시를 할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하지만, 그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주어진 화두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시초로 작업하다보면 그림이 자연히 그를 이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잘라 붙인 색종이일 때도 있고, 우연히 끌린 신문의 디자인일 때도 있다. 혹은 매일 새벽 운동길에 발견한 장구마구리가 시작일 때도 있다. 그 시작이 무엇이 되었든 우선 작업을 시작하면 기산은 그 다음이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마치 즉흥 연주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작가의 삶이 녹아있다. 이성적인 통제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몸에 내재되어 있던 것들이 느리게 혹은 빠르게 화면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작가의 내면을 담은 글귀가 담긴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원사대가 중 예찬은 문인 화가가 갖추어야할 첫 요인을 사기(士氣)로 보았다. 지순임, 『중국화론으로 본 회화미학』(서울: 미술문화, 2005), 282쪽.
사기는 ‘선비의 품격’으로 이는 그저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서양화와는 다르게 작품의 가치는 평하는 기준이 된다.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개인사적 인생이 가십은 될 지언즉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진 않지만, 동양의 문인화에서는 작가의 기운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고 이것이 바로 작품의 격을 알 수 있는 척도였다. 이러한 문인화의 경지는 당대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이 그러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한 소식의 평에서도 알 수 있다. 위의 책, 102-104쪽.
기산 역시 몇 권의 시집을 내었고, 시(詩)와 화(畵)를 하나로 본 문인화처럼 항시 글귀를 그림 한켠에 배치하였다. 
근작에서는 “보기 좋은 삶이, 행복한 삶일까?”와 같은 인생의 화두를 던지기도 하고, ‘멈출 수 없는 변주’라는 의미로 ‘Unbroken Variation’을 마치 결심이라도 하듯 반복적으로 쓰기도 한다. 이는 작품을 진행하면서 혹은 마무리 하면서 덧붙여져 그림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든다. 더불어 글귀를 통해 보는 이가 작품을 통해 사색하기를 희망한다. 예찬이 그린 빈 정자에서 청렴하고 고상한 문인의 인품을 깨닫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하고 추사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歲寒圖)>에서 추위에도 곧은 소나무를 그려 자신을 오랫동안 믿어온 제자의 성정을 칭송하듯, 기산 역시 작품 속 글귀를 통해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이 자신이 가진 인생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을 공유하길 바란다. 자신이 구현한 시각적 화면에서 말이다. 

편경의 사각
기산의 근작에는 사각의 기하학적 형태가 두드러진다. 이는 2016년에 원형과 부채꼴을 테마로 했던 금강홍(錦江虹) 시리즈와는 또 다른 변주이다. 사각의 화면은 2017년 여름에 전시한 신동엽 시인을 기리기 위한 작품에서도 등장했다.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 화면에 먹과 채색물감을 층층이 쌓아올려 이룬 시리즈로 동학운동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신동엽 시인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근작의 사각 화면 안에도 마치 조각보처럼 크고 작은 사각의 색종이를 오려 붙여 화면을 잇기도 한다. 조각보와 같은 화면은 이전의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해왔던 것으로, 기산에게 조각 하나하나는 중생(衆生)의 마음을 상징한다. 중생이 하루를 살아내듯, 서로 다른 색과 크기, 형태의 조각들이 모이다 보면 결국 하나의 조각보가 된다. 그리고 이 조각보가 바로 인생이며, 우주이고 결국 신의 세계가 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조각이 모여 이루는 광활한 우주의 원리를 신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작은 색종이 조각으로 시각화한다. 간혹 종이 조각은 신문의 조각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이 있거나 혹은 글자가 있는 신문조각은 또 다른 삶의 결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내다. 이러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기법은 서양미술에서 아방가르드적 사유를 했던 작가들의 방식으로, 이를 통해 기산의 작업은 수묵화라는 장르의 한계를 넘어선다. 
오랜 전부터 기산은 재료의 선택에 있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장구의 울림통 양쪽을 막는 장구마구리를 화폭삼아 그리기도 하고, 바느질 하듯 실을 박기도 하였다. 이는 수묵화를 전통적인 체계 안에서 해석하고 창조하려는 태도와는 다르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이 처한 현 시대를 이해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시각화하는데 있어 스스로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소재에 대한 선택의 자유로움은 전통악기인 편경으로 작가의 관심이 옮겨가면서 편경 특유의 각을 작품에 부여하게 하였다. 편경은 총 16개의 돌을 깎아 서로 다른 음이 나도록 만들어진 악기이다.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각기 다른 각도와 두께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기산은 바로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내기 위한 편경의 형태에 주목하였다. 사각의 화면 속에 기역자, 수직이나 수평의 사각형, 십자 형태로 배치된 사각형들 등 다양한 사각들이 배치된다. 그리고 이 사각들은 음악의 한 소절처럼 자신의 리듬과 멜로디를 갖고 있으면서도 작가 작품을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고요한 피아노곡이 되기도 하고 거대한 교향곡이 되기도 한다. 여러 작품 속의 사각들은 그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두께나 길이, 혹은 색이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이들은 마치 실제 음악의 진동처럼 작가가 화면을 기울이는 방향에 따라 물감이 흘러내리는 떨림을 가지고 있다. 
물감은 똑바르게 흐르지 않고 약간씩의 진동폭을 가지며 흘러내린다. 바탕의 질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형태일 것인데, 이는 마치 소리가 공기 중에서 진동을 가지며 흘러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원리처럼 느껴진다. 편경을 치면 그 소리가 진동 폭을 만들며 우리에게 다가오듯, 사각의 색면에서 흘러내린 물감은 우리에게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결합되는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한다. 

편경의 울림과 금강의 물결의 일체화
물감의 흘러내림으로 시각화된 편경의 울림소리는 기산의 예술세계에서 금강으로 확장된다. 기산에게 있어 금강은 그의 삶과 예술의 원천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대전에서 터를 잡고 활동한 만큼 기산에게 있어 금강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기산은 금강(錦江)을 예찬한다. 비단강이라는 뜻처럼, 비단이 소란스레 뽐내기 보다는 조용히 자신의 고고한 자태를 내보이듯, 금강 역시 유유히 흐르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절경이라고 할 만한 유독 빼어난 경치가 없음에도 충청남도를 넓게 돌아 품으며 백제의 문화를 만들어낸 저력을 가진 강이라 평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의 숨결이 있는 부여와 삼천궁녀의 전설이 서려있는 백마강이 바로 금강의 부분이니 금강을 빼고는 백제를, 그리고 충청남도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금강의 흐름처럼 기산은 작업을 계속하고파 한다. 
어린 시절 금강변에 터를 잡고 적지 않은 시간을 대전에서 작업을 하면서 그에게 있어 금강은 휴식이자 안식처였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작업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저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우직함은 기산을 버티게 해주었다. 더하여 금강은 마음의 고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얼마 전 다녀온 인도여행에서 본 갠지스 강을 말하며 기산은 강이 가진 힘을 ‘정화와 치유’에서 찾는다. 겉보기에 깨끗해 보이지 않는 갠지스 강이지만 인도인들은 그 강의 신적인 힘을 믿으며 몸과 마음을 씻고 죽은 자를 떠내려 보낸다. 이러한 강의 힘을 기산은 더 일반화하여 물의 힘으로 여기고 예전부터 작품으로 표현한다. 작게는 한 잔의 물을 표현하기도 하고, 크게는 금강으로 나타낸다. 그에게 있어 강은 작업의 원천인 동시에 큰 힘이 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강을 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아야할 모습으로 추상화한다. 
기산은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의 말을 빌린다. “예술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예술은 최고의 실재이다!” 수잔 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What is art)』,, 이승훈 역(서울: 고려원, 1982), 13쪽.
이에 따라 기산은 자신이 보고 느낀 금강 그 자체를 추상적 화면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 만들어지는 금강의 물결은 편경의 울림과 같은 맥을 갖게 된다. 편경의 사각으로 만든 화면 역시 결국은 ‘금강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기산의 새의 눈으로...
전라북도 장수에서 시작해서 무주구천동을 지나, 조치원의 미호천과 대전의 갑천 등 크고 작은 지류가 모여 이루어진 금강, 그리고 군산항을 통해 서해로 나간다. 기산은 금강의 흐름을 설명하며 마치 자신의 삶의 굴곡인 듯 회상한다. 크게 멋들어진 곳은 없지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금강의 모습처럼, 기산의 삶과 예술은 각 시간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금강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를 기산의 새가 난다.
기산의 새는 스승인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를 방작 한 작품에서도 날고 있고, 금강홍에서도 날고 있다. 한 잔의 물 컵에 들어가 잠기기도 하고, 신동엽의 저항세계를 함께 들어보기도 한다. 그래서 기산의 새를 따르다보면 금강의 강줄기를 따라 흐르듯, 기산의 예술세계를 유영하며 들여다볼 수 있다. 어느 때는 하늘 높이 날며 강을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낮게 날면서 수면의 빛 그림자를 느끼기도 한다. 간혹 쉬고플 때는 강가에서 잠시 쉬면서 강의 물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니 기산의 새를 따라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몸의 힘을 빼고 공중의 새가 되듯 날아 들어가, 작품 속 편경 소리를 들어보고 그 떨림을 몸으로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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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畵音의 세계

고광률 |  소설가


소리와 색·면
장엄함이 전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전체는 부분을 아우른 것이다. 표현되어지지 않은 것까지 표현되어져 있는 것이 전체의 힘이다. 표현되어지지 않은 여백이 표현하고자 했던, 그러나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캔버스에 머물 뿐이다.
기산 선생은 이 이차원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같다. 캔버스가 악보를 연상케 하는데, 악보가 음표로 구성되어져 있는 것이라면, 선생의 캔버스는 형상에 소리를 담고 있다. 소리를 형상으로 담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오방색(청·백·적·흑·황)과 오음계(궁·상·각·치·우)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데, 흑/백이 서로 완고한 긴장을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롭다. 오히려 색감이 돋보여 경계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소리를 매개로하여 이차원에 묶어두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해방시킨 느낌이다. 그림이 시원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개별 그림과 전체 그림의 조합 속에 역동적인 힘이 있다. 그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기운의 실체가 음(音)이라는 생각이다. 대립과 단순성 속에 음이 있는데, 이 음이 장엄함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오방색 속으로 오음계를 불러 캔버스에 들어앉힌 것인데, 고정된, 정지된 소리의 형상화가 아니라, 캔버스 안팎을 드나들며 연주되어지는 음이라는 것이다. 그림과 소리가 만난 것인데, 그림의 파장과 소리의 여운이 있다. 마치 음이 그림을 압도하는 듯한데, 조화롭다.

변주되어지는 그림
〈축제〉는 여러 점이 각자의 ‘소리’를 담고 있는데, 이 소리들이 모아져 한 점의 작품을 이룬다. 모을 때 순서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생성된다. 기산 선생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편집되어 새롭게 창조하는 그림’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리와 형상이 서로 어우러져 시공을 넘나들고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축제가 되는 것이다. 순백의 편경이 빗줄기처럼 흐르면서 축복의 단음(單音)을 연주한다. 작품과 감상자 사이를 새가 드나들며 매개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중국의 고문헌인 『주비산경』에 나오는 말로, 각진 것은 땅에 속하고 둥근 것은 하늘에 속하니, 땅은 각지고 하늘은 둥글다 라는 뜻이다. 선생은 땅을 바탕삼아 오방색으로 오행을 풀이했다. 하늘의 이야기가 아닌, 땅의 이야기이기에 군말을 달기도 했다. 아마도 선생은 자신의 그림에서 일상의 절절함과 소중함이 읽혀지기를 노심초사하는가보다.
기산 선생은 이번 작업에서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도 그림에 담았다. 굳이 아놀드 하우저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림 역시 미디어이다. 사실과 의견이 구체적 의미 속에서 문자화된 메시지가 추상적인 기호들과 만나 형상화되어질 때, 어떤 울림을 가져올 수 있을까. 미디어를 통한 소통일수도, 미디어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림을 통한 담론화 시도라고 느껴져 새롭다. 
흑/백의 편경이 맞붙어 하나의 음을 연주하는 그림도 있다. 오직 흑과 백의 만남인데, 둘이 아닌 하나의 소리를 담고 있다. 편경을 모로 세워 시를 넣고 아내와 자신의 사진을 붙였다. 흑과 적으로 나눈 공간 속에 하나의 음이 흐른다.
스탕달의 『적과 흑』을 모티프로 삼아 그 속에 편경을 들인 작품 또한 인상적이다. 백색 편경이 단호하고, 거기서 나오는 음의 흐름이 자못 절절하다. 문학에 대한 동경과 문학적 감동에 대한 회화적 형상화의 각별함이 엿보인다.
쇼팽의 녹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작품에서는 편경이 강렬한 푸른빛을 쏟아 내리는데, 색감이 주는 충격으로 자못 신비롭고 경이롭다.

예술과 일상의 접경에서
편경이 음을 잔뜩 머금고 있다. 편경은 검고 음은 서정성을 띈 잿빛인데, 더욱 단아하고 심플하다. 앞서 본 작품들과는 분위기와 느낌이 다르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앞으로의 창작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롤로그 같았다.
선생의 작업실에서 만난 이번 작품들은 심플한데 풍요롭고, 고아한데 다정다감하여 애틋했다. 이폴리트 테느(Hippolyte Taine)가 작가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천막을 치고 사는 유랑자와 같다 라고 말했다. 아마도 평생을 지고 온 예술혼과 그 틈서리마다 지겹게 들러붙어 스며든 일상의 절절함이 만나는 경계 어디쯤에서 선생이 도달할 ‘궁극의 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노트

강물 흐르듯 가야하는 길목에서


정명희 |  화가



21세기를 산다고 자인하면서 가끔 내가 어느 곳에 서 있는지 방황할 때가 있다.

콜라쥬Collage와 파피에콜레Papier Colle나 오브제Objet를 알던 때가 새삼 그립기 때문이다. 1960년대초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잡지 '미술수첩'과 '아트리에'를 접하던 시절은 차라리 꿈결인 듯 아름다웠었다.

한 인간의 일생을 70±30년으로 보든지, 80±20년으로 보든지 간에 100세 시대라고 떠든다. 그러나 역사문화를 생각해 보면 짧디짧은 단기간이다. 이 단기간의 여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소중하게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소위 '아노미Anomie Phenomenon'현상에 빠져 자신의 삶을 송두리채 잃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정체성, 특히 예술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혈통과 가계의 영향으로 얻어지기도 하지만, 성장하면서 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얻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성적 시야가 넓어지면서 스스로 개척한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즉 외적인 영향에 의한 패치워킹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강화되고 변화,발전된다.

이와같이문화적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자리풍토요소, 혈동, 체질적 요소, 물리적 요소등에 의해 정신적 요소로 환원된다. 몽테스키의 국민성과 칸트의 혈통체질론과 마르크스의 물질결정론 등이 이를 증거한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문명권, 중동의 이슬람 문명권, 힌두 문명권, 불교 문명권과 극동의 유교문명권 등도 서로 패치워킹 하면서 존속 발전되어 왔다가 중론이다. 그런 유교문명권의 국가중에서 서구문명을 가장 빨리 받아들였다는 일본보다 다소 늦게 받아들였으면서도 뒤지지 않고 세계화에 성공한 한국의 예는 가히 추종을 불허하는 예에 속한다.

현대는 패치워크Patchwork 문명시대다. 패치워크는 패션Fashion 기법이 문명사에 접근하면서 미술용어의 콜라쥬, 파피에콜레를 뛰어넘어 인류사를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다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게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화와 양화가 서로 어울린 것은 이미 과거다. 이제는 장르와 장르가 꺼리낌없이 서로를 탐닉하고 있다. 따라서 장르와 장르간의 문제를 벗어나 도시와 도시,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허무러졌다. 이젠 개인과 개인간의 소통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인 것이다.

문제는 200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여 결국 다시 원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 질서 같던 윤회의 경계를 깨버리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허욕에찬 욕망을 탓하기에는 아미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최근 강물이 가지고 있는 '빛과 소리'에 대해 명상의 시간을 적극 할애하고 있다. 그곳에 치유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연과 사물이 인간과 소통하듯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순응하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작품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모이는 곳 "대전공연전시" http://www.gongj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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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전공연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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